고교시절부터의 개인적인 테마 중 하나인데, 흔히 사람들이 인간의 특성으로 꼽는 이성이라는 놈이 그렇게 특별한
건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엔 이성이 특별히 본능보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본능을 반드시 꾹꾹 눌러둬야 하는 필요성도 본능의 대칭점에 이성을 놓아야하는 이유도 잘 모르겠다.

본능이란거 사실 무지하게 냉철하고 합리적인 물건이다.(여자보면 바지 벗고 거시기만 덜렁 거리는 것만 본능이 아니고)
고작해야 수십년간 축적하는 개체의 정보와 달리, 세대를 거듭하면서 축적되는 막대한 정보량을 근거로 가장 최적화된 프로세스다.
거기다 꼭 따로 안 가르쳐도 안정적으로 보존된다는 특성도 있다. 고양이랑 같이 기른다고 개가 고양이랑 똑같이 행동하진 않으니까.

나나니벌은 다른 곤충의 몸에 기생하는 유충을 낳는데, 이 과정에서 숙주를 마취시키고 땅굴을 파서 숙주를 넣고
그 위에 알을 접착시킨 후, 땅에 묻는다. 그런데 나나니벌이 땅굴을 메우기 전에 눈 앞에서 알을 들어내어도
나나니벌은 그대로 굴을 메운다.

이것만 보면 본능이란 맹목적이기만 한 지침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나니벌의 인지능력과 사고능력의 한계를
생각해 볼 때, 그리고 나나니벌의 알이 공격을 당할 전체적인 확률을 생각해 볼 때, 본능이 하던 일을 마치게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나나니벌에게 [만약에 땅굴을 메꾸기 직전, 알을 강탈당할 경우를 상정한 대처 능력]을 가지게 하는 것보다 오히려
효율적이지 않을까? 모든 생물에겐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은 3차원을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새나 물고기의 본능적인 3차원 지각과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있을까?
나나니벌의 경우는 그것이 다양한 상황에 관련된 사고능력의 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충-알이 공격 당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성장 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대대적으로 실험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태하거나 다른 선택을 한 종과 달리 나나니벌의 유전자에 남은 선택은 먹이와 함께 알을 파묻는 것이었고
그것이 나나니벌의 사고능력에서 가질 수 있는 한계일 것이며 이 복잡한 정보를 그들의 유전자는 본능의 형태로
저장한 것이다.

무엇보다 본능은 생물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모든 정보이다. 생물학적으로 완성된 몸을 가지고 생물로서의
정보인 본능을 가지지 못한 어떤 동물을 생각해보자. 숨은 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자율신경이니 부교감신경이니
하는 것도 결국은 뇌가 아예 관여 안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과 사고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사고와 지각과 전혀 관련 없는 다른 기능일 것인가? 그렇다면 심장의 맥동이나 우리의 호흡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냥 일정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분명 근육이 많은 활동을 하면 부족한 영양과 산소의 공급을 위해 숨은
가빠지고 심장은 열심히 뛴다. 소뇌니, 해마니 하는 부분들이 관장하는 본능 역시 지각과 사고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보다 복잡해지는 다른 개체와의 관계등에 대한 본능 역시 그러하다. 성적 욕구에 대한 본능이나 식욕에 대한 본능 등.
이것들이 천하다는 대우를 받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것은 우리가 생물적으로 획득한 무리동물로서의 본능이다.
무리동물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정보 보존과 무리의 보존 두가지의 상황에 대해 선택적인 행동을 하고, 두가지에
동시에 부합하지 않는 상황에 대해서는 자신의 보존에 우선하도록 되어있다.(이기적 유전자라던가)
그런데 이것이 무리 동물로서가 아닌 사회 동물(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예라고 볼 수 있겠다)의 사회에 그대로
적용되기에는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사회 동물이 획득한 "사회를 유지시키는 방법(본능이 아닌 이성의 규율이랄까)"이
무리 동물이 획득한 "무리를 유지시키며 살아가기 위한 본능"과 충돌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이 선택한
"사회를 유지 시키는 방법"을 [본능을 우선 획득하게 마련인 생물인 다른 개체]에게 납득시키려면 그것을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교육해야할 필요가 있다. 마치 수간이 미치는 위생적 악영향을 일일이 설명하기 보다 염소를 악마로 가르친 것과 같다.

원죄, 7의 대죄니 하는 것들을 보면 대부분이 본능적 욕구와 결합된다. (선악과의 죄도 이 본능과 이성의 싸움에서
찾을 수 있다. 다만 이 경우 본능을 죄악시 한게 아니라 그 반대에 가깝다는게 재미있다.)
마치 인간이 [신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고난]을 달게 받아들이듯이 본능도 이성을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격하되고 죄악시 된 것이다.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인간의 언어 사고에 대한 생각도 이것과 같이 생각 해 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언어로 생각을 한다고들 말하는데 나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언어는 정리-표현의 도구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기호화-그리고 음성화하는 도구이다. 여기에 시각적 기호화를 덧붙이면 문자도 포함된다.
표현을 위한 정리를 돕기 때문에 언어는 스쳐 지나가는 언어화 되지 않은 사고보다 명확하다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의 특징은 모호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꽃의 모양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다만 우리는 끊임없이 교류하는 생물이기 때문에 사고를 언어화하는 버릇이 들게되고 따라서 사고의 언어로의 전환이
무시무시하게 빠른 것이지(마치 영어를 오래 사용한 한국인이 한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것보다 그냥 영어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사고 자체가 언어의 형태를 띄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음성언어에 대한 지식과 지각이 없는 완전한 농아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물론 문자가 우리의 음성언어를 기반으로한
기호화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는 문자로 생각하는 것도 힘들것이다.
아예 문자도, 언어도 모르는 농아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수화를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다.(적어도 행위나 물체에
대한 기호화가 가능하다면)
이들의 경우 우리와 같은 사고를 할 수 있을까? 동일한 언어적 사고가 아니지 않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커뮤니케이션-표현을 위한 프로토콜이 다르긴 하지만 근본적인 언어화되지 않은 사고가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화되지 않은 사고가 그렇지 않은 사고보다 모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때때로 모호해 보이는 이유는 언어화 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의 특징과 같다. 설령 그것이 가능한 세필과 특수한 물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물의 세포나 털, 피부의
잔주름을 일일이 그리는 화가는 없다. 그럴 바에야 직접 일일히 묘사하는 그림이 아닌 한번에 그냥 다 담아버리는
초고화질의 사진을 찍는 것이 낫다. 즉 모호화는 엄청나게 많은 정보량을 줄이기 위한 것이며, 그것은 사물을
표현하는 그림만이 아닌 사고를 표현하는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국어와 수학은 다르니까 언어와 수학도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두 학문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국어는 자신의 주장이나 기분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한 논리적인 과정(아바밥바바로 내가 느끼는 달콤함을 전하긴
힘들지 않겠는가)이고 수학 역시 계산을 정리하고 전달하기 위한 논리적 과정이다.
암산을 빠르게 하다보면 머릿속으로 수식을 짜고하지 않아도 불쑥 답이 튀어나올 때가 있을 것이다.
언어-기호화를 할 시간도 없이 뇌가 먼저 답을 제출한 것이다.

인간은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인다. 오감이라고 하는 다섯가지 감각도 수많은 복잡한 정보들을 받아들인다.
손으로 더듬어서 느끼는 것만히 촉감이 아니다. 중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무거운 액체를 촉감을 느끼는 주머니
안에 넣어두어보자. 중력과 관성, 운동 등에 의해 변화하는 무게분포와 압력에 의해 주머니는 중력의 방향, 운동상황 등을
계산하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우리의 중력감지 센서인 세반고리관의 구조이며 정밀 기계에 들어가는 운동센서도
같은 구조다. 이것도 촉감이다. 원시적인 감각이지만 촉감은 모든 오감의 근본이다.
간단히 촉감이라고 하지만 촉감은 압력에 대한 감각과 온도에 대한 감각이다.
온도를 느끼는 부분이 발달하고 이것이 가시광선에 극도로 민감해지면 시각이 된다(일부 조개의 원시적인 눈은
빛의 유무 정도만을 감지한다. 뜨거운 조명을 우리가 피부로 느껴서 그 조명의 방향을 감지하는 정도의 감각이다).
고막의 울림-즉 압력을 감지하는 촉감은 뇌가 음성신호로 해독하면서 청각이 된다.
특정한 분자와 수용체세포의 결합(극소 단위의 압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을 공기중으로 느끼면 후각, 침에 녹아
나온 것을 혀로 느끼면 미각이 된다.

결국은 극도로 첨예화된 압력과 온도의 정보를 뇌에서는 분류하고 해석하여 오감의 정보로 만든다.(물론 전문적으로
받아들이는 기관과 신경이 있으니 가능한 것이지만) 이 방대한 정보의 처리와 그에 대한 대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하드웨어-신체-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OS-본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있어봐야 하드웨어를 구동시킬 OS가 없으면 말짱 꽝 아닌가.
본능이 지금 우리의 세계관-인간이라고 구분 되는 것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낸 규율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서
본능은 우매하고 저열한 것이라고 평가하다니. 반대로 언어나 그것들로 쌓아올린 문화와 문명의 MEME이 없다고 해서
동물적인 인류가 지금의 문명화된 인류보다 멍청하거나 천박한 것은 아니다.

미분적분 모르고 음식 손으로 집어먹는다고 해봤자. 결국은 맨손으로의 사냥이냐 뼈다귀를 들고 하는 사냥이냐 정도의 차이다.
도구가 잘나진 거지 인간이 잘나진 게 아니라니까.(뭐, 하도 오래 그 도구에 길들여 져서 몸조차도 많이 바뀌었으니-슴가가
 빵빵해지는 등 신체 구조상 변화가 꽤 있다.- 이젠 이성이라는 도구 없으면 못 살 것 같긴 하다)



P.S 여기와서 그런 태클 걸 사람은 없겠지만 본능도 좋은 거라고해서 별거 아닌 이성 버리고 본능적으로 살자! 라는건 아님
인간으로서의 이성이란건 인間(사이 간자를 좀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 거 같은데 이건 무리의 뜻이 아닌 사회라는 뜻임.
즉 사람이란 개체를 인간으로 정의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사회에 소속되고 그 집단의 프로토콜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
인간이라는 種이 되기 위해 필수적인 거임. 사람하고 인간은 서로 다른 종이니까.
그저 우리는 하드웨어와 OS와 기타 소프트웨어와 주변기기의 총합이니까 그중에 하나 업신여기거나 하나만 우대하진 말자는 거지.
총합 이라는 점에서 뭐 하나만 달라도 아주 다른게 되어버리니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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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피의 잉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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